[기사] 44년 차 트랜스젠더 배우 '미래'의 인생 수업
뿅혜
본문
성소수자의 정체성은 선택이 아닌 필연
밤문화 종사자 편견 깨려 연습 또 연습
외부 활동은 트랜스젠더 삶 증명하기 위함
사회적 이슈 있을 때마다 ‘공공의 적’ 취급
악플 신경쓰기보다 오늘 하루의 삶에 집중
'트랜스젠더 양로원' 만들고 싶은 포부 간직
후배들에게 책임감 있는 사람 기억됐으면

우리는 성소수자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편견이라는 벽 뒤로 숨어버린 그들의 삶을 떠올릴 때, 흔히 ‘화려함’이나 ‘유흥’이라는 단어를 덧씌우곤 한다. 하지만 64세 트랜스젠더 ‘미래'(본명 안영석)의 인생은 치열한 생존의 기록이었다. 1980년대 초 이태원 밤무대의 주인공이었던 그녀는 44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무대 위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예술인이자 사라져 가는 성소수자 노인들의 내일을 고민하는 운동가로 살고 있다. 지난 18일 서울 이태원의 한 카페에서 차별과 편견을 당당한 걸음으로 헤쳐온 1세대 트랜스젠더 배우 정미래를 만나 우리가 보지 못했던 트랜스젠더의 ‘필연적인 삶’에 대해 들어보았다.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은 선택 아닌 필연
슬픔과 동시에 해방감 느낀 아버지의 죽음
-언제부터 스스로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나?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부터 제 자신이 보통의 남자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당시에는 트렌스젠더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절이라 그저 ‘나’라는 사람으로 살았죠. 트랜스젠더 정체성은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었어요. 하느님이 사람을 빚으실 때 성별을 잘못 넣어주신 거라 생각할 정도로, 저는 태어날 때부터 내면이 여자였습니다. 나답게 살기 위해 몸이 내면을 따라가는 것은 생존과 같은 것이었죠.”
-군인 집안의 엄격함 속에서 자아를 억누르며 살았다면서?
“숨이 막혔죠. 아버지는 군인이셨고 굉장히 보수적이셨어요. 밥상 문화조차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밥상을 따로 차려 먹을 정도로 매우 보수적이었어요. 여자 같은 제 목소리를 고치려 웅변학원에 보내질 정도로 저의 내면을 드러내지 못하고 항상 억누르며 살아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슬픔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꼈다는 건 어떤 이유인가?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사고로 다리를 절단했고 비관 자살을 하셨어요. 아버지의 죽음은 슬픔이기도 했지만 거대한 틀에서 나오는 시작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엄격함에서 벗어나 비로소 제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한국무용, 연극 등 예술의 길을 걷기 위해 서울예술전문대학교(서울예전) 연극과에 진학했고, 모델 학원과 극단에서 활동하며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내 모습을 찾기 시작했어요. 이태원 클럽 ‘열애’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공연 활동을 이어갔고 무대 위에서 자신을 표현하며 희열을 느꼈습니다.”
-학창 시절 성소수자임을 밝혔을 때 어떤 일을 겪었나?
“고등학교 시절 동창들이 ‘호모’라고 놀려도 당당히 ”나는 여자야“라고 맞섰습니다. 그런데 대학을 갔을 때 여성호르몬 주사를 맞으면서 몸이 점점 여성처럼 변했고 남자 탈의실을 쓰기 힘들어져 학교를 중도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내 정체성을 숨기고 남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은 거짓 인생이라 믿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학장님을 찾아가 제 정체성과 그동안 남들보다 더 충실하게 살았던 과정을 말씀드렸고 감사하게도 학장님께서 제 연극적 역량과 노력을 인정해주셔서 졸업장을 주셨어요. 그 귀한 졸업장을 받았던 건 잊지 못할 자부심입니다.”


밤 문화 종사자 편견 깨려 연습으로 실력 키워
여러 외부 활동은 트랜스젠더 삶 증명하기 위함
-당시 이태원 유명 클럽 ‘열애’에 데뷔하게 된 계기는?
“고3 때 친구에게서 ‘이태원에 화장하는 남자들이 모이는 곳(열애)’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어요. 잊고 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무작정 화장을 하고 찾아갔다가 당일 클럽에 합격을 했어요. 1984년 5월 4일, 그 날은 제 인생의 2막이 시작된 날입니다.”
-밤 문화 종사자라는 편견을 어떻게 이겨냈나?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제가 일하는 곳을 단순히 돈 버는 장소가 아닌 무대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제나 일에 충실했고 대중의 편견보다는 무대 위에서 저를 표현하는 즐거움에 더 집중했습니다. 남진의 '가슴 아프게’를 부르다 음치라는 핀잔을 듣고 지하 연습실에서 거울을 보며 수많은 연습을 통해 립싱크 기술을 익힌 것처럼, 매 순간 쇼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연습실에서 발레와 재즈 등을 배우며 열심히 노력했고 학창 시절 배운 분장 기술을 무대에 활용했어요. 어린 나이지만 그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예명이 '미래’인데 이름에 담긴 뜻은?
“80년대 일하던 이태원 클럽 사장님께서 ‘미래를 밝혀줄 아이’라는 의미로 그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본명 '안영석’으로는 이 세계의 나를 모두 담을 수 없었기에 그 예명을 쓰게 됐습니다.”
-연극과 영화, 다큐멘터리 촬영 등 다양한 외부 활동을 이어가는 목적은?
“세상이 우리를 단면적으로만 보게 두기 싫어서입니다. 트랜스젠더가 어떻게 꿈을 꾸고 고통을 이겨내는지를 관객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증명하고 싶어서 2025년 처음으로 두산아트랩에서 저와 색자, 미란 세 명이 실제 트랜스젠더의 서사를 주제로 한 ‘이태원 트랜스젠더-클럽 2F’이라는 다큐멘터리 연극 공연을 했습니다. 1970년대부터 이태원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트랜스젠더 클럽의 공연 예술과 그들의 생애를 90분간 다뤘습니다. 그리고 세 주인공들의 삶의 과정과 실제로 몸담고 있던 클럽의 실제 이름과 사진도 공개했고 실제 클럽에서 공연하는 가요나 팝송, 엔카까지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춤과 함께 립싱크로 보여줬습니다. 지금은 제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늘 당당한 제 삶의 색깔을 보여주고 저라는 사람의 진실된 삶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지금도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는 이유는?
“제 무기는 '색깔’입니다. 젊은 후배들도 많지만, 나이 든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묵은지의 맛이 있어요. 공연할 때마다 똑같은 옷을 두 번 입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끊임없이 연습하고 콘텐츠를 개발하는 노력 등은 저라는 사람을 브랜드화하여 누구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려는 의지입니다.”

사회적 이슈 있을 때마다 ‘공공의 적’ 취급
악플 신경쓰기보다 오늘 하루 삶에 더 집중
-이슈가 있을 때마다 성소수자를 희생양으로 삼는 분위기에 어떻게 대처했나?
“예전 ‘에이즈’ 이슈가 있었을 때 우리를 ‘공공의 적’ 취급했죠. 보건증을 만들려 해도 남자 얼굴로 만들어야 하는 현실 앞에 분노했습니다. 저는 당시 보건소장이었던 주혜란 박사를 직접 찾아가” 화장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어주셔야 트랜스젠더들이 보건증을 만든다”고 설득해 화장한 모습으로 보건증을 받을 수 있게 문턱을 낮춰 안전한 검진 문화를 정착시킨 경험도 있습니다.”
-편견 섞인 시선이나 모욕적인 반응에 어떻게 대처하나?
“저는 후배들이 무시당하는 꼴을 못 봐요. 손님들이 트랜스젠더라고 대놓고 무시하면, "그럴 거면 여기 왜 왔냐, 돈 필요 없다 꺼져라"라고 직접 응대합니다. 제가 욕을 먹더라도 후배들이 상처받는 건 참을 수 없습니다. 초반에는 상처를 받았지만 44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초월했어요. 나를 미워하는 이들 때문에 내 인생을 망치는 것보다 오늘 하루 내가 무엇을 맛있게 먹고 누구와 즐거운 대화를 나눌지에 더 집중합니다.”
-사회의 인식 개선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느끼나?
“하리수 씨 등장 이후로 전보다는 시선도 곱고 악플도 줄었어요. 긍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트랜스젠더에 대한 인식이 대중화되면서 개성이 평준화된 측면도 있어요. 개인의 삶보다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여 평가받는 면은 좀 아쉽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이 든 트랜스젠더들에 대한 편견은 심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현역으로서 제 가치를 증명하며 살고 있습니다."


‘트랜스젠더 양로원’ 만들고 싶은 꿈 있어
후배들에게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트랜스젠더 양로원’을 만들고 싶은 꿈이 있다고?
“화려한 전성기를 지나 노인이 되었을 때, 아무것도 없이 버려진 동료들의 차가운 마지막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얼마 전 제 정신적 멘토였던 선배가 돌아가셨는데 쓸쓸한 장례 절차를 보며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외롭게 떠난 이들을 보며 그들의 고통이 결국 우리 모두의 미래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우리들만의 따뜻한 보금자리가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거창한 건 없습니다. 텃밭을 일구고 소일거리를 하며 죽음을 함께 맞이해 줄 공간입니다. 최소한의 동료가 곁에 있는 삶, 나이 들어 서로 의지할 수 있고 뒤치다꺼리를 해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제 삶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 현재 제작 중인 다큐멘터리를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남기고 싶나?
“성소수자들은 사회의 해악이 아니라 그저 열심히 산 사람들이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습니다.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후회 없는 삶을 살았으니까요. 상류층의 삶도 살아봤고 도박에 빠져 빈털터리가 돼 맹물만 마시던 밑바닥까지의 삶도 살아봤기에 내일 죽더라도 미련이 없습니다. 다만, 먼저 떠난 선배들의 장례를 챙겨주고 주변의 후배들에게 긍정적인 유산을 물려줄 수 있도록 끝까지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런 생각을 했다. 그녀는 성소수자라는 카테고리에 갇힌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 좁은 길에서 가장 뜨겁게 자신을 피워낸 ‘인간’이었다. 술집 마담에서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으로, 후배들의 멘토에서 성소수자 양로원을 꿈꾸는 기획자로 변신하는 그녀의 모습은 우리가 가져야 할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어냈다.
“남들처럼 정상적인 코스를 밟았다면 지금 더 안락했을까?”라는 물음에 그녀는 “내일 죽어도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단호함은 우리 사회가 소수자를 대하는 태도에 던지는 숙제다. 우리가 그들의 정체성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한 인간이 지켜온 삶의 고유한 ‘색깔’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그녀가 말하는 ‘트랜스젠더 양로원’은 성소수자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인권의 척도로 다가오지 않을까?
https://www.mindl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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