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소설] 퀸스 배틀 - 3편 > 익명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익명게시판

[창작소설] 퀸스 배틀 - 3편

익명
2025-12-13 13:32 213 0

본문

바람바람 홀은 쇼가 끝난 직후 특유의 냄새로 가득했다.
화장품, 땀, 향수, 조명이 오래 켜져 생긴 열냄새까지 뒤섞인 공기.
지수는 좁은 복도에 서서 손끝에 남아 있는 떨림을 숨기지 못했다.


혜란이 무대에서 내려오던 순간, 분위기는 이미 이상하게 흐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손님들의 시선과 조명을 한 몸에 받던 여왕이었지만,
지금은 힐 굽으로 바닥을 강하게 찍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지수는 악수처럼 조심스럽게 시선을 맞췄다.
혜란은 지수를 스치듯 보며 짧게 말했다.


“오늘 운 나쁘네….”


그 말투는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패배감과,
누군가에게 억지로라도 우위에 서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섞인 느낌이었다.


지수는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괜히 더 건드렸다가는 불똥이 튈 것 같았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기태가 트레이를 팔에 끼고 빠르게 다가왔다.


“지수야.”
기태의 목소리엔 특유의 가벼움과 장난이 섞여 있었다.


지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혜란 언니… 팁 30으로 떨어졌어.
손님들 표정 다 봤지? 분위기 확 식었어.”


기태는 마치 주식 시세를 전하듯 말했고,
지수는 속에서 작게 숨을 삼켰다.


“생각보다… 적네요.”


“여기선 작은 금액 아니지. 근데 혜란 언니 입장에선 치욕이지.”
기태는 히죽 웃으며 이어 말했다.
“그래서 지금 더 예민할 거야. 조심해.”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갑작스레 클럽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기태가 먼저 그쪽을 봤고, 눈이 커졌다.


“어? 잠시만… 설마—”


지수도 몸을 살짝 틀어 그 방향을 바라봤다.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중년 남자.
걸음에서부터 돈 냄새가 퍼져 나오는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
무대보다 먼저 그가 들어오면, 손님들조차 움직임을 멈춘다.


기태의 입에서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속삭임이 흘렀다.


“…박사장님 오셨다.”


지수는 박사장이라는 이름이 이태원 바닥에서 영향력이 더 크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팁만 하루 천만 원을 던진 적 있고,
이태원 아가씨들 사이에서는 사실상 ‘권력자’.


혜란도 그 모습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유리언니—아니, 유리언니라고 부르는 마담—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매끈하게 미소를 그렸다.


박사장은 이미 많이 취한 얼굴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발목이 꼬여,
문턱도 제대로 못 넘고 ‘턱’ 부딪히며 크게 휘청거렸다.


기태가 웃음을 참으며 테이블은 안내했다.
“사장님, 오늘 A룸 비었어요. 들어가서 잠깐—”


“아니야아… 나 지수 보러 왔단 말이야.”
박사장은 비틀거리면서도 자신 있게 걸어오려다가
카펫에 발끝이 걸려 또다시 푹— 앞으로 숙여졌다.


지수의 입에서 나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장면이 처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리언니는 옆에서 잔을 들며 고개를 저었다.
“저 인간은 대체 언제 철이 들까…”


기태가 황급히 박사장을 붙들었다.
“사장님, 지수 언니 지금 손님 응대 중이시잖아요.”


“괜찮아~! 지수는 내 마음 아~알아~~”
말끝이 늘어져 흐르고, 혀도 반쯤 꼬인 상태였다.


기태는 지수를 바라봤다.
도와달라는 눈빛이 아니라,
“미안해요, 또 시작입니다…” 같은 체념 섞인 표정.


지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태야, 그냥 A룸에 모셔다 드려. 넘어지기 전에.”
“네, 언니.”


기태가 양쪽에서 부축해 박사장을 끌고 가는데,
박사장은 여전히 버둥버둥 거리며 외쳤다.


“지수야! 나 오늘 돈 많이 챙겨왔단 말이야! 나 좀 예뻐해줘!”


그러곤 마지막에 크게 “나 미남이지!!!” 라고 외치며 끌려 나갔다.


유리언니는 바로 짜증을 부린다.
“아 진짜… 미남은 무슨… 분리수거 분류해도 못 찾겠다.”


지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 조금만 살살 말해.”


“나 오늘 착하게 말한 거야.”
유리언니는 잔을 내려놓고 지수를 바라봤다.
“근데 너는 괜찮아? 저 인간한테 귀찮게 안 당했어?”

 

지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익숙하지 뭐. 매주 보잖아.”


유리언니는 잔을 굴리며 미묘하게 시선을 피했다.
“익숙하다고 좋은 건 아니야. 너 불편하면 말해.”


박사장은 결국 테이블 한쪽에 턱을 괸 채로 흐느적거리더니, 잔을 내려놓자마자 그대로 소파에 쓰러졌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규칙적인 코 고는 소리가 라운지의 조명을 타고 퍼져 나갔다.


지수는 잔을 치우려다 멈칫하며 잠든 박사장을 바라봤다.
‘…진짜 골아버렸네.’
긴장이 살짝 풀리며 숨이 편안해졌다.


혜란이 먼저 가볍게 웃었다.
“아이구… 오늘 완전 만취 코스네. 이런 날도 있지 뭐.”
익숙해 보이는 표정, 짜증이 아니라 그저 오래 본 손님에 대한 체념 같은 온도였다.


기태가 슬쩍 다가와 테이블을 정리하며 말했다.
“누나들, 좀 쉬세요. 사장님은 제가 챙길게요.”
기태 특유의 싹싹한 말투는 어수선한 테이블 끝을 차분하게 묶어주는 힘이 있었다.


유리언니(채유리)는 물잔을 들고 가볍게 턱을 괴었다.
“하… 오늘 진짜 혼신을 다했다. 아휴, 지친다.”
잔에 입을 대며 긴 숨을 내쉰 그녀의 표정엔, 손님이 잠들고 난 뒤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여유 같은 게 비쳤다.


지수는 옆자리에 조심히 앉아 흐트러진 쇼파 쿠션을 정리했다. 쿵쿵대던 분위기가 가라앉고 나서야, 이곳이 살짝 포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혜란이 다리를 풀며 말했다.
“지수야, 처음 봤을 때보다 표정 많이 편해졌네?”
지수는 작게 웃었다.
“혜란 언니도요… 저보다 훨씬 힘드셨을 것 같은데.”


혜란은 피식 웃었다.
“야, 난 이쪽 생활 오래 했다? 잠들어준 손님이 최고라니까.”


기태가 테이블로 다시 와 컵을 정리하다가 말했다.
“근데 오늘 박사장님, 기분 무지 좋으셨던 것 같던데요?
아까 지갑보니 현금 장난아니예요. 저 깜짝 놀랐어요.”


유리언니가 턱을 괴고 기태를 흘겨봤다.
“기태야, 너 돈 얘기만 나오면 눈 반짝이는 거 아주 못 말린다니까.”


기태는 괜히 헛기침했다.
“일이니까 그렇죠… 그럼 뒷정리 조금만 더 하고 올게요.”

 

지수는 세 사람 사이의 말투에서 묘한 친근함을 느꼈다. 번쩍이는 조명 아래 반짝거리는 보석들보다, 이런 사소한 대화가 이 공간을 더 인간적이게 만드는 것 같았다.


잠든 박사장이 크게 뒤척였다.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향했다.


유리언니가 물잔을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분 언제 깰까…?”


혜란은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말했다.
“한 시간은 더 잘걸요. 아까부터 이미 정신 나가 있었잖아요.”


지수는 박사장의 헝클어진 옷깃을 보고 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깨어 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낫다. 깨어 있으면 누군가를 붙잡고 자꾸 상담하려 드니까.


유리언니는 팔을 주무르며 말했다.
“조금 있다가 깨우고 기사 불러서 보내자.
이 상태로 억지로 앉혀봤자 서로 힘들어.”


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오늘은 여기서 끝내자. 다들 수고했다.”


지수는 테이블에 놓인 반쯤 식은 과일 조각을 보며 작게 숨을 골랐다.
손님이 잠들고 난 뒤의 이 고요함.
시끄럽던 웃음과 긴장의 흐름이 사라지고 나서 찾아오는 짧은 공백—
이곳에서 하루하루 적응해가는 자신을 문득 실감했다.


그리고 지수는 문득, 박사장의 손에서 아직도 은은하게 나는 술향을 스쳤다.
이 세계의 냄새였다.
그리고 이 밤이 또 하나 쌓여가는 중이었다.

 

 

반응이 좋으면 4편에서 이어 가겟습니다......

댓글목록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쓰기

제휴할인

Powered by 쿠팡

전체 9,402 건 - 6 페이지
번호
제목
2,184
2025-12-28
3,003
2025-12-28
810
2025-12-28
1,973
2025-12-28
2,693
2025-12-27
1,436
2025-12-27
2,191
2025-12-27
1,699
2025-12-27
9,129
2025-12-27
3,722
3,722
2025-12-27
2,957
2025-12-27
3,191
2025-12-27
3,596
2025-12-26
1,672
2025-12-25
1,748
2025-12-25
6,792
2025-12-25
1,100
2025-12-25
1,337
2025-12-25
2,995
2025-12-25
1,275
2025-12-25
3,019
2025-12-23
1,481
2025-12-23
9,116
2025-12-23
2,739
2,739
2025-12-23
1,480
2025-12-23
1,514
2025-12-22
2,482
2025-12-22
1,371
2025-12-21
2,592
2025-12-20
1,029
2025-12-20
3,604
2025-12-20
4,367
2025-12-20
9,107
2025-12-20
2,444
2,444
2025-12-20
4,687
2025-12-19
1,779
2025-12-19
2,010
2025-12-18
2,025
2025-12-18
2,342
2025-12-17
1,794
2025-12-17
3,358
2025-12-17
6,185
2025-12-16
1,738
2025-12-16
1,938
2025-12-16
2,325
2025-12-14
359
2025-12-14
2,116
2025-12-14
9,093
2025-12-14
1,991
1,991
2025-12-14
891
2025-12-13
1,789
2025-12-13
2,000
2025-12-13
2,389
2025-12-13
214
2025-12-13
409
2025-12-12
9,086
2025-12-11
5,248
5,248
2025-12-11
9,085
2025-12-11
1,259
1,259
2025-12-11
게시판 전체검색